미-러 스파이 사건으로 냉각…러시아 반발, 외교 마찰 조짐
“확실하고 믿을 수 있는 상대다.” 지난 24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후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또 당일 두 정상은 오바마 대통령의 단골 햄버거 가게를 찾아 ‘햄버거 오찬’을 통해 우의를 과시했다. 하지만, 두 정상의 우정이 진심이었는지를 의심할 만한 일이 터졌다. 두 정상이 얼굴을 맞대고 담소를 나눈 지 불과 4일 만인 28일 미 법무부가 자국에서 활동한 러시아 정보요원 10명을 간첩 혐의로 체포했다고 발표한 것. 미국 측 발표에 대해 러시아 정부가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하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29일 미 당국에 사건 진상을 설명해 달라고 촉구했고 외교부는 미국 측의 주장에 대해 자체적으로 조사하고 있으나 미국 당국이 제시한 정보들이 서로 모순되며 근거 없다는 입장이다. 안드레이 네스테렌코 외교부 대변인은 “왜 미 법무부가 냉전 시대에나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를 공개적으로 발표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면서 “미국이 스스로 양국 관계 재설정에 성공했다고 평가하는 상황에서 이런 일이 발생해 유감”이라고 말했다. 이번 일로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 조성된 양국 간 화해 분위기에 먹구름이 끼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더욱이 이들 러시아 간첩이 미국 정책입안자들의 모임에 침투하고 무기류와 외교전략, 정치 상황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데 동원됐다는 점에서 이들의 처벌과 별개로 양국 간 외교 문제로 비화할 가능성도 있다는 지적이다. 니콜라이 코발로프 국가두마(하원) 의원은 이타르타스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 간첩들이 땅에 파묻은 공작금을 찾아갔다는 기소 내용을 언급하면서 “마치 첩보 소설을 보는 것 같다. 21세기에 누가 그런 짓을 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전 연방보안국(FSB) 국장을 지낸 그는 “이번 간첩 사건은 미국 내 매파들이 러시아에 대해 강경 노선을 가질 필요가 있음을 알리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블라디미르 콜레스니코프 하원 의원도 “유감스럽게도 아직도 미국 내 냉전 유산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러시아에도 미국 첩보 요원들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도 똑같이 대응할 수도 있다”면서 “과거에는 간첩 혐의로 적발된 미국인들을 조용히 추방했지만, 앞으로는 우리가 그들에게 더 엄한 형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는 러시아가 과거 냉전시절처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으로 보복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번 사태가 양국 관계를 훼손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없지 않다. 알렉산드르 토르신 연방의회(상원) 부의장은 리아 노보스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사건이 대규모 간첩 스캔들로 확산하지 않을 것이고 냉전으로 돌아가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독일 dpa 통신은 이번 사건 역시 냉전이 끝났다고 해 러시아 간첩들이 서방에서 활동을 완전히 중단했다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전했다. 2001년 미국은 외교관 지위를 갖고 활동한 50명의 러시아인을 추방했고, 2002년 스웨덴은 2명의 러시아 외교관을, 가장 최근인 지난해 4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도 2명의 러시아 외교관을 스파이 혐의로 추방했다. 그런가 하면 1997년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과 연방수사국(FBI) 요원이 러시아에서 간첩 혐의로 적발돼 각각 징역 23년형과 27년형을 선고받았다.